밀알복지재단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최근 ‘제9회 일상 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에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함께 진행, 기존 일상부문에 고용부문이 추가됐다.

공모전 결과 이음미 씨의 ‘빙산의 일각’ 일상부문 대상, 박수현 씨의 ‘우리의 삶이 해석되는 순간’ 고용부문 대상 등 총 30개 입상작을 선정해 시상했다.

입상작 중 대상 2편, 최우수상 4편, 우수상 9편 등 15편을 소개한다. 세 번째는 일상부문 최우수상 수상작인 유혜진의 ‘엄마의 노래’이다.

엄마의 노래

유혜진

초록이 온 세상을 덮으면 엄마는 방에만 있는 것을 답답해하셨다. 아니 어쩌면 엄마만 집에 두고 매일 나가야 했던 내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른다.

바람 좋은 어느 날, 나는 엄마를 모시고 집 근처 맛집으로 향하였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나는 한 걸음, 엄마는 세 걸음. 그렇게 나의 속도와 엄마의 속도는 자꾸 차이가 났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였다. 뇌출혈 후유증으로 온 몸이 제 기능을 잃은 엄마. 어서 마지막을 준비하라던 병원에서 엄마는 기적처럼 깨어나 보란 듯이 웃는 얼굴로 퇴원을 하였다. 그 때부터 엄마는 마치 다시 태어난 아이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갔다. 장애1급으로 다시 시작한 삶. 걸음마부터 왼 손으로 밥을 먹는 것까지, 죽은 세포는 부활할 수 없다 하니 사용하지 않았던 세포들을 흔들어 깨우는 일은 보호자인 내 몫이 되었지만 나는 엄마가 내 곁에 살아있음에 감사하였다.

그런 엄마가 걸음마를 떼고 신나게 외출을 한 것이다. 고작 10분 거리를 엄마는 30분이 걸렸고, 그렇게 신호등 앞에 섰을 땐 이미 보행자 신호 초록불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겨우 일차선의 횡단보도. 내 걸음으로는 성큼성큼 1분도 걸리지 않는 그곳이 엄마와 나에게는 만리장성보다도 멀고 길게 느껴졌다. 반도 채 건너지 않았는데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고 말았다. ‘엄마를 업고 가야하나’ 아니면 ‘눈치 보지 말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이 만리장성 같은 길을 끝까지 완주해야 하나?’

다행히 차주들이 기다려주어 절반까지는 무사히 건넜는데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그냥 지나가버렸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워하고 있는 내가 더 못나보였다. 그 순간 오만가지 생각으로 엄마 손을 강하게 붙들고 끌고 갔던 내가 더욱 싫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밖에 나오니 그저 좋으셨던 모양이다. 횡단보도를 다 지난 엄마는 42.195km 마라톤의 승리자가 된 것처럼 세상을 다 얻은 표정이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워했던 나도 엄마가 웃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엄마, 좋으신가?”

“아~~이~~ 요~~~” 엄마는 알 수 없는 노래로 대답하셨다.

엄마는 언어중추의 손상으로 말을 잃게 되었다. 어린 시절 큰 딸이라는 죄인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엄마는 글을 잘 알지 못했다. 말을 잃고 글도 모르는 엄마에게 소통은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대화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도 엄마는 눈치 백단이어서 나의 말을 곧잘 알아들으시고 엄마 나름대로의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수어를 배운 적도 없었고, 엄마의 인지기능도 상당히 떨어진 상황이어서 우리의 대화는 모든 육감을 총동원한 감각적인 교감이자 소통이었다.

맛있는 것도 드시고 싶었을 것이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을 텐데도 엄마는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차려주는 밥을 드시는 것, 내가 입혀주는 옷을 입는 것, 내가 모시고 가는 곳에 가는 것. 그렇게 전적으로 나를 의존하며 살아야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려야 했다. 엄마의 필요가 무엇인지 빨리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그간 갈고닦은 눈치와 실력으로 엄마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어야했다. 가끔 엄마가 불편을 호소할 때면 그 불편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어느 여름날엔 모기에 물려 엄마의 얼굴이 빨갛게 부어올랐는데도 긁을 수 없이 참아내야 했던 엄마를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런 날이면 나는 모기와의 전쟁을 치루기 일쑤였다. 어디서 그렇게 들어왔는지 아무리 막아도 모기는 움직이기 힘든 엄마의 몸에서 마음껏 피를 뽑아갔다. 속상해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그 정도쯤은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엄마, 아이궁~ 안 아프신가?”

“아~~ 이~~ 요~~~” 엄마는 또 알 수 없는 노래로 대답하셨다.

엄마는 아프시기 전에 노래를 곧잘 부르셨다. 어릴 적 나는 엄마의 노랫소리를 매일 듣고 살았었다. 엄마 노래는 때로 구슬펐고, 때로는 흥겨웠다. 엄마가 술을 좀 드시고 노래할 때는 빠짐없이 젓가락이 등장했다.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르던 엄마는 여지없이 엄마 잃은 딸의 모습이었다.

눈물 가득하게 불렀던 ‘여자의 일생’은 가수 이미자씨 저리가라 할 정도로 슬프고 가여운 여인의 노래였다. 나는 아마도 뱃속에서부터 엄마의 노래를 태교로 듣고 자랐을 터, 내게 가장 익숙하고 친밀하며 따스하고 정다운 소리는 단연코 엄마의 노랫소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 엄마의 노래엔 남모를 한이 서려있었다. 못 배우고 자랐던 소녀의 설움이 담겨있고, 동생들 돌보느라 언 강물을 깨며 빨래 주무르던 한겨울의 추위가 담겨있고, 매정하게 돌아섰던 친정아버지를 향한 미움도 담겨있고, 살아내느라 버티고 애써왔던 한 여인의 긴긴 생존의 세월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노래하다가 울고, 울다가 노래하고, 또 노래하다가 잠이 들곤 하였다.

세월이 지나 엄마가 할머니가 되던 순간, 나는 몸조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외손주를 보여주며 물었다.

“엄마, 손주 예쁜가?”

“아~~ 이~~ 요~~~” 엄마는 또 그렇게 알 수 없는 노래로 대답하셨다.

손주가 울면 어눌한 몸으로 다가가 한 팔로 손주를 안아주려 했던 엄마는, 자신이 할머니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절망을 처음으로 느끼셨다. 손주를 안으려다 아이를 떨어뜨릴 뻔한 일 때문에 엄마는 자신의 어눌하고 불편한 몸을 보며 할머니가 된 기쁨도 잠시, 한없이 또 한없이 울었었다.

자신의 못난 팔, 자신의 못난 다리, 자신의 못난 입과 혀를 한탄하고 또 한탄하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할머니가 드디어 되었는데, 손주의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한 자신을 처음으로 느끼신 것이다. 그날 밤부터 엄마는 자주 우셨다. 손주 얼굴을 바라볼 때도 우시고,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볼 때도 우시고, 내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을 때도, 내가 밥을 차리고 있을 때도 우셨다. 내가 엄마를 목욕 시켜줄 때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런 나를 보시며 엄마는 그 옛날 엄마의 슬픈 노래를 다시 부르셨다.

“아~~ 이~~ 요~~~”, “아~~ 이~~ 요~~~”

이제 나는 안다. 그때 부르던 알 수 없는 엄마의 노래를. 그 노래의 의미를.

자식이 뭐라고.. 딸자식 고생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을 어미 마음. 그건 딸자식을 아꼈던 엄마의 애절한 마음이었다. 그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던 어미의 절망이었음을. 말 못하는 어미를 둔 자식을 바라보는 긍휼이었음을. 다시 태어날 수 없는 엄마의 인생과 삶에 대한 후회이자 한이었음을 나는 안다.

어떤 말로도 다할 수 없는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나는 이제 안다. 기쁨과 절망이 공존하고 설움과 한, 사랑이 엉켜있던 그 때 엄마의 노래는 이제 내게 그리움이다. 절대적 미안함이며, 생명보다 귀한 고마움이고, 이 세상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없는 사랑이다.

말을 하지 못하였어도 엄마는 온 몸과 온 맘으로 내게 사랑을 말하셨다.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였어도 마지막 삶의 순간까지 자식을 위해 호흡하셨다. 내가 엄마를 돌본 것이 아니라, 사는 내내 엄마가 나를 돌보고 키우고 지켜주셨다. 나는 오늘도 그립고 보고 싶은 엄마에게 말을 한다. 내내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한다.

“엄마, 거기서 아프지 않고 잘 있는가.. 내가 많이많이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요.”

“아~~ 이~~ 요~~~”

오늘도 엄마의 노랫소리가 여름 바람을 타고 내 마음으로 가득히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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