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이어 준 음악
김종훈은 1968년,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천성 백내장과 녹내장으로 인한 고도약시였다. 현재 왼쪽 눈은 완전 실명, 오른쪽은 사물의 형체만 알아볼 정도인데 진행성이라 점점 잔존 시력이 사라지고 있다.
부모님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들으며 장난감 피아노를 갖고 놀았다. 그래서 피아노를 사 주셨는데 시력이 약한 김종훈은 너무나 큰 피아노 앞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바이올린 악기를 접했는데 어깨에 올려놓고 볼에 악기를 붙이고 연주를 하는 방식이 안정감을 주었다.
그래서 5학년 때 본격적으로 레슨을 받았다. 그가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굵은 매직펜으로 달력에 직접 악보를 그려 주셨다. 김종훈은 그것을 눈 가까이에 대고 한 음표 한 음표 보면서 열심히 악보를 외워서 연습을 하였다.
김종훈은 초등학교부터 쭉 일반학교에 다녔다. 다행히 여의도중‧고등학교에 약시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학 3학년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서 저녁에는 큰 레스토랑에서 트리오팀으로 연주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서 집안에 보탬이 될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여 학교 공부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 4학년 때 김의명 교수 강의를 수강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너는 바이올린을 열심히 하면 참 잘할 수 있겠다.’ 라는 말씀에 용기를 갖고 큰 목표를 갖게 되었다.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다는 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에게는 인생을 바꿀 만큼 큰 영향을 주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 4학년 2학기 실기시 험에 불참하여 재수강을 할 정도로 공부에 열정이 생겼다.
그러나 1991년 대학을 졸업한 그의 앞에 펼쳐진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다. 보통 연주자들은 오케스트라에 취업을 하지만 시각장애가 있는 김종훈은 그것이 어려웠다. 음악의 한계가 느껴져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학창 시절 부산콩쿠르에서 1위를 하여 고무되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1992년 동아콩쿠르에 도전하여 3위를 차지하였다. 연습용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였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독일 유학 생활
친구가 운영하는 음악학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며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독일에 살고 있던 대학 동기의 도움으로 1994년 독일 유학을 가게 되었다.
유학 준비를 한참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큰 고비가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거의 빈손으로 유학 생활을 시작했기에 학교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가장 싼 빵을 사서 끼니를 때웠는데 곰팡이가 핀 빵을 먹는 것을 보고 친구가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베를린 국립음대 유학 시절은 이렇게 고생스러웠지만 독일에서도 그를 붙잡아 준 스승을 만났다. 울프 발린 교수는 ‘누구든지 잘 배우고,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다’ 며 장애가 문제가 안된다는 사실을 심어 주었다. 그래서 울프 교수는 그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었다. 실내악에서 연주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합주는 김종훈이 할 수 없는 장르란 생각을 일반적으로 하고 있었고 본인도 엄두를 못내고 있었지만 그것이 독일에서는 가능했다.
유학 중 현악4중주를 결성하여 학교에서는 물론 크고 작은 행사에서 연주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다양한 무대를 경험하며 자신감이 생겼을 무렵, 제2 바이올린을 담당하는 여학생과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그의 눈이 되어 주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에서 유학 온 여학생으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이였는데 현악4중주 활동을 하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유학 생활에서 고생도 많았지만 결혼을 약속한 피앙세도 얻었고, 김종훈은 베를린 국립음대를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뉴욕 카네기홀, 유엔본부, 독일 대통령궁 초청 연주, 상트페테르부르크필하모닉 협연 등 다양한 연주 활동을 하였고, 독일에서 각 분야의 유망주에게 주는 상인 악셀 스프링거상(Axel Springer Preis)을 수상하면서 7년간의 독일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귀국 후 음악 봉사 활동
2000년 귀국한 후 김종훈은 바로 결혼을 했다. 어머니가 하시던 일은 아내가 해주었 다. 같이 공부를 했기 때문에 아내는 음표를 읽어 주는 것 외에 그의 연주 활동 전반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모교 출강을 시작으로 숭실대학교에서는 현악합주 과목도 강의할 수 있었다. 레슨과 공연 등 모든 그의 일정을 관리해 주는 아내 덕분에 바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김종훈은 자신이 주위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듯이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병원 연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첫 연주가 끝나고 환자들이 열렬히 환호해 주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듀오글로리아’ 라는 이름으로 그를 포함한 멤버 두 명이 연주를 했는데 주로 찬송가와 클래식을 편곡해서 연주했다.
그러다 2007년 피바디음대 최초로 시각장애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클라리넷 연주자 이상재 박사가 제안하여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실내악단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라’의 악장을 맡았다.
당시 장애예술인으로 활동이 많았던 테너 최승원, 클라리네티스트 이상재, 피아니스트 김예지 등과 함께 ‘희망으로’ 라는 음악봉사단체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2011년도에는 발달장애 음악인으로 구성된 에이블아트오케스트라 창단을 도와주었다.
장애예술인을 위해
그는 현재 시각장애 음악인들로만 구성된 ‘한빛예술단’ 음악감독이다. 2006년 창단된 한빛예술단은 음악을 통해 시각장애인의 직업 창출과 자립 능력을 돕는 장애예술인 전문예술단이다.
김종훈은 2014년부터 한빛예술단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한빛맹학교에서 음악적 재능이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음악인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에 게는 큰 사명감을 주었다.
“음악을 통해 삶을 연주하고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음악은 삶의 치열함을 표출하는 또 하나의 돌파구가 되기도 합니다. 저도 늘 도전 중입니다.”
그는 한빛예술단과 해외 공연을 많이 다녔다. 일본, 미국, 러시아, 브라질 등 세계 많은 나라에서 공연을 하며 한국 시각장애 음악인의 뛰어난 실력으로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16년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장애인올림픽 축하 공연을 위해 브라질에 갔을 때 리우데자네이루대학에서 대학합창단과 한빛예술단이 함께한 공연이었다.
연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우리의 연주 실력에 남미 사람들 특유의 열정적인 반응에 우리 단원들이 놀랄 정도였다. 대학 합창단도 아마추어였지만 화음이 너무나 웅장하고 멋져서 단원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단원들이 퇴장을 할 때 서로 엉키고 말았다. 무슨 난리가 난 것처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출구를 찾느라고 아우성을 쳤다.
2022년 4월 29일, 한빛예술단이 최다 암보 최장 시간 오케스트라 연주로 KRI한국기록원 공식 최고기록 인증에 성공했다. 이 도전에는 31명의 한빛예술단 소속 시각장애인 음악인이 참여했다.
김종훈 음악감독의 지휘로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연주는 5시간 동안 이어졌다. 해당 연주를 참관한 백형기 공연 전문가는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가 5시간 이상 모든 곡을 암보하여 연주하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며, ‘오늘 그 모습을 현장에서 볼 수 있어서 공연 전문가로서 영광이었다.’ 고 했다.
경기병서곡, 훅돈클래식, 헝가리무곡 등 클래식 64곡을 모든 단원이 암보해 단상에 선 지휘자 없이 오케스트라 연주를 해낸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빛예술단은 20년 동안 매년 100회 가까운 공연을 소화하며 호흡을 맞춰 왔기에 이번 도전이 가능했다.
한빛예술단은 한국기록원 기록인증을 토대로 세계기네스북과 미국 World Record Committee(WRC, 세계기록위원회) 등에도 도전을 이어 나갈 예정이다.
김종훈은 처음에는 반대를 했다. 음악은 양이 아닌 질, 즉 좋은 음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하지만 예술단 경영을 하는 입장에서는 특이한 도전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기에 열심히 준비를 하여 큰 성과를 이뤄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훈의 바람
김종훈은 한국 장애예술인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순회 연주를 하는 등 공익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왔다. 그래서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수여하는 제11회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갈고 닦았다. 2008년에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여 세간의 관심을 집중받기도 하였다. 이 연주회는 작곡가 탐구시리즈로 슈만과 베토벤 곡을 대학교수와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미라클 아이즈’ 라는 타이틀로 이미 세 차례 공연을 하였다. 김종훈은 바이올리니스트로 실내악 연주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는 가정적으로 행복하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는 대학 4학년이고, 둘째는 고3이다. 아직 음악을 하는 자녀는 없지만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부의 꿈이다.
시력 저하가 진행되고 있어 언제 어둠에 갇히게 될지 모르지만 두렵지 않다. 지금도 눈이 아닌 온몸이 그를 움직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을 하며 시각장애로 정교한 기교를 구사하지 못하여 답답할 때 교회에서 기도를 하며 음악은 악기로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연주를 해야 연주자의 감정이 전달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듯이 그에게 바이올린이 있는 한 시력은 중요하지 않다는 인생관이 생겼다.
“그동안 가르치고 함께해 온 제자들과 더불어 챔버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음악 연주를 많이 하고 싶습니다. 멤버들과 진지한 음악을 다루고, 깊이 있는 음악을 연구하는 목표를 가지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제가 평생 동안 가져왔던 경험과 지식들이 잘 활용돼 후배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베를린 국립음대에서도 처음에는 한국에서 온 시각장애 학생이 낯설었을 것이다. 하지만 편견 없이 기회를 주었기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하였다. 당시 베를린 국립음대에서 김종훈은 유명한 학생이었다. 졸업 후에도 학교에서 성공한 졸업생으로 수업 시간에 종종 김종훈 사례를 언급했다고 한다.
김종훈은 시각장애인이 유학을 가지 않아도 국내에서도 좋은 연주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면서 후배를 양성하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칠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연주 활동을 하기를 원한다.
김종훈
1987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특차합격(문교부 특기자 선정)
1991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2000 Hochschule Fur Musik Hanns Eisler 졸업(전문 연주자 과정)
1986년 청주사대 콩쿠르 대상
1986년 제3회 부산콩쿠르 1위
1992년 제32회 동아콩쿠르 3위 입상
독일 Axel Springer Preis상
제11회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대상
한국장애인소리예술단과 일본 5개 도시 순회 연주 독일 대통령궁 초청 연주, 베를린 국립음대 후원 이사회 초청 연주 조선일보 신인음악회, 세화재단 초청 독주회, KBS 열린음악회 출연 금호문화재단 초청 독주회 세종문화회관을 비롯 대구, 대전에서의 귀국 독주회 서울바로크합주단, 서울심포니, 유라시안필, 대구시립교향악단 대구필하모니, 영남필하모니 등과 협연 UN본부 초청연주(2014)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필하모닉 협연(2015) 대한민국국제음악제 출연(2022) 미라클 아이즈 콘서트(202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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