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 화가김환 화가.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이상(異常)하다

김환은 1991년생으로 올해 32세이다. 그가 태어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는 평범한 삶을 갈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붙어 버린 그 이상함을 떼어 버리기 위해 현대의학에 매달렸다. 3 년 동안 전신 수술을 하였고, 15년 동안 재활치료를 받았다. 도대체 그에게 붙어 있는 이상함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것일까?

초산이라서 양수가 터진 채로 시간을 보내다가 3개월이나 일찍 태어난 아기는 미숙아였기에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고열에 시달렸던 것이 아기를 뇌성마비로 만들었다. 뇌성마비의 특징인 제멋대로 움직 이는 근육을 바로잡고, 그것을 제어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수술 후 무료한 병원 생활의 유일한 낙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거의 낙서 수준이었지 만, 부모님은 잘 그렸다고 칭찬해 주었다. 입원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주로 그렸다. 아마도 병원 밖 세상에 대한 동경에서인 듯하다.

어린 환에게 병원은 무서운 곳이 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곳은 다름 아닌 학교였다. 그 당시는 장애 인에 대한 인식이 낮았을 뿐 아니라 도시 같지 않고 순박한 작은 지방도시는 이상하다는 표시를 노골 적으로 하여 상처를 주었다.

엄마 등에 업혀 등하교를 하는 환을 아이들은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혼자 있는 시간 그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온전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서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편안했다. 그의 그림을 힐끗 본 몇몇 아이들이 그에게 다가와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만화 캐릭터와 권총 같은 무기 그림을 보면서 아이들은 침을 튀기며 만화 캐릭터 대사를 외치기도 하고 총을 쏘는 시늉을 내며 그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어느덧 학교에서 그림 잘 그리는 학생이 되어 사생대회에 많이 나갔다. 그는 이미 6학년 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할 만큼 자기 길을 일찍 정했다. 그런데 혼자서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 가지고는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미술학원에 가야겠 다고 생각했지만 그즈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서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씀을 드렸는데 어머 니는 아들이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학원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으로 학원에 등록을 시켜 주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수동휠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친구들이 휠체어를 밀어 주었다.

그는 학원에 다니며 수험생 형들의 밑그림을 그려 주는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기도 했다.

나를 찾아서

김환은 태어나서 20세까지 춘천에서 살았다. 강원대학교 미대에 합격을 했지만 재수를 했다. 부모님은 미대를 원하지 않으셨기에 재수를 허락하였다. 대학은 취업을 위한 전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이 재수를 택한 목적은 부모님 생각과는 완전 달랐다. 그는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려면 집에서 아주 먼곳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하 고, 물리적인 독립을 해야 심리적으로도 독립을 할 수 있기에 대학을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교로 정했다.

목원대학교가 장애인 우수대학이라고 하여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건만 막상 입학을 하고 학교에 가니 어려움이 많았다. 1학년 수업을 듣는 미대 강의실은 가건물이라서 화장실에 가려면 계단으로 내려 가야 했다.

부모님은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들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못마땅한데다 아들이 고집을 꺾지 않고 다시 미술을 전공하자 한숨을 쉬셨다. 환은 부모님한테 손 내밀지 않고 살기 위해 장학금을 목표로 공부를 하였다. 2학년 때교수님이 본교로 보내 주셨다.

작업 모습작업 모습.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김환 때문에 교사(校舍) 로테이션을 앞당겨 주신 것인데 그로인해 선배 학년이 가건물에서 1년을 더 보내게 되었다. 환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본교 캠퍼스 안을 빠르게 이동하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은근히 그에게 압박을 주기도 했다.

학교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는데 동기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군대에 간 것이다. 그를 도와 주던 친구들이 어느 날 싹 없어져서 갑자기 불편을 느끼곤 했다. 선배들이 복학을 하면서 같은 학년이 됐는데 그 선배들은 그림을 열과 성을 다해서 그리는 화가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환도 공부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가 너무 좋아하는 교수님이 있었는데 그 교수님을 따라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런데 대학원은 장학금이 안 나와서 부모님께 공부를 좀 더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언제나 아들의 결정을 믿고 지원해 주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이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지만 대학원을 졸업할 때는 핑계도 없었고 앞날이 더욱 불투명했다.

동기들은 싼 곳에 작업실을 구해 동료 작가들이랑 서로 의지하면서 공모전에 응모하며 경력을 쌓아 가는데 월세가 싼 작업실은 영락없이 편의시설이 없어서 접근이 어려웠다. 같이 작업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시를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이야기를 하는 기회도 없어졌다. 그는 점점 고립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님을 찾아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교수님 추천 소개로 대전에 있는 유성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자립생활대학 간사로 일을 시작했다. 학장이 전맹이어서 문서 읽어 주기나 문서 작성 등의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학장의 이동을 위해 운전도 하는 등 잡다한 일이 많았다. 보수는 학장의 근로지원인으로 받았기 때문에 생활비도 되지 않았다.

일을 시작할 때의 약속은 미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는데 2년 동안 근무하면서 작품을 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일을 더 이상 계속하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을 하며 김환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자립생활센터를 통해 많은 장애인 분들을 만나면서 장애인의 현실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본인이 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 세계를 접한 것은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물론 첫 장애인 친구는 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할 때 만난 룸메이트였다. 그 친구와 1년반 함께 지냈는데 흐릿하게 보이는 시각장애인이어서 그 친구는 김환의 손과 발이, 그리고 그는 그 친구에게 눈 역할을 하면서 상부상조하던 관계였다.

나의 길 위에서

대전에 있는 이응노미술관에서 아트랩대전으로 대전에 있는 청년 작가들이 전시회를 열 수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제1기로 지원을 해서 선정이 되었다. 그것이 김환에게 큰 기회가 되었다. 다시 그림 세계로 돌아온 안도감이 생겼다.

활동 사진활동 사진.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운영하는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에 참여하였다. 토요일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미술 수업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교사였다. 그의 수업 목표는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모두 다르다.’ 는 것으로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워 주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사전 교육을 받고 회의도 하느라고 서울을 계속 왔다갔다하면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잠실에 장애인화가를 위한 창작스튜디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을 하여 입주 작가가 된 것은 29세 때였다. 작가들에게도 정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잠실에서 장애인작가들을 만나면서 삶이 많이 달라졌다. 장애인작가의 유니크도 하나의 독창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전에서 KTX를 타고 잠실로 오고가는 것이 힘들어서 8년 동안의 대전 생활을 접고 춘천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가지 못할 때는 스튜디오에서 쪽잠을 자면서 10기, 11기, 12기 3년 동안 잠실에서 장애 라는 정체성을 가진 장애인화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신체의 지각

비장애인과 함께 성장하며 신체의 한계로 만들어지는 괴리감 속에서 방황하며 만들어진 고민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캔버스에 표현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김환이 그림을 그리는 목적이다.

이응노미술관 아트랩대전으로 갖게 된 첫 번째 개인전시회 제목 <신체의 지각>은 ‘우리의 몸은 거대한 다이아몬드의 흠집같다.’고 말한 멜로퐁티 책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신체의 지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꼭 장애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학교 시절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성소수자였다. 그 친구는 김환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함께하 면서 뭔가 다름이 느껴졌다.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작업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그의 작품 속이미지에서 드러났다. 어쩌다 성소수자 얘기가 나오면 김환도 대다수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부모님 세대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혐오였다.

어느 날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에게 물어보았다. 친구가 김환에게 계속 고백하고 싶어하는 사인을 보냈고, 그렇게 물어볼 수 있는 정도의 관계가 되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친구는 솔직히 자신의 정체성을 털어 놓았다. 친구 역시 자기가 원해서 성소수자가 된 것이 아닌데 온갖 비난과 차별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 친구를 통해서 김환은 자신을 표현하거나 감추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그도 작품 속에서 성소수자의 현실을 표현하곤 하였다. 장애를, 창문을 오브제로 프레임으로 표현했다면 창문을 통하지 않은 풍경의 오브제는 전봇대로 그 색은 성소수자의 깃발 색이다. 고향에 전봇대가 많았다.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전봇대가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일상에서 느꼈던 이상함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봇대를 선택하게 되었다. 김환은 나름 대로 미술로서 사회운동을 했던 것이다.

나의 길이 평범하기를 원한다

그는 미술을 평생 하면서 전문작가로 활동하며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전시회에서전시회에서.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가진 특수성이 유니크함으로 표현되면서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게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사회적으로 제 실력에 비해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서 더 정진하려고 하는 건데… 장애예술인으로 포함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은 아직까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생각이 나중에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예술 행위를 하고 싶다는 거예요.”

언어장애를 덜어내기 위해 혓바닥 수술을 받았고, 말을 하는 연습을 지금도 한다. 긴장을 하면 경직이 와서 말이 원하는 대로 안 나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해 줄 수없으니까 자신이 더 강심장이 돼야 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활동을 하며 경력을 쌓아 가다 보니 고향인 춘천, 더 넓게는 강원도 내에서 초청을 받곤 한다.

“서울은 장애인예 술에 대한 담론이 이슈화되고 있지만 지방은 아직 그렇지 못한 실정이라서 안타 까워요. 꿈이 있다면 아래층 눈치 안 보고 새벽까지 작업할 수 있는 개인 작업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돈을 벌고 싶은 게 아니고 작업을 하고 싶어요.”

너무나 멋진 김환이 가장 약한 부분은 무엇일까 싶어서 던진 사랑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 했다.

“실상 장애인의 연애라는 게 힘들잖아요. 여친은 있었지만 제가 힘들더라고요. 어쨌든 남잔데 책임감이 생기잖아요. 연애를 하면서 복지 형태의 그런 도움을 받아야 되니까 그게 많이 힘들었어요.”

작가에게 ‘창문틀(Frame)’이란

과거에는 저희 신체적 한계와 괴리감을 표현하는 소재였다면 이후에는 밖과 안을 이어 주는 소통의 주체였고 최근에는 공통의 대상을, 그러니까 실재하는 현재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김환 작가의 작품에서는 외부 세계로서의 풍경과 그것을 담아내는 액자와 같은 창이 존재 한다. 스스로 풍경화가라고 소개하는 작가의 그림에는 나타나지 않더라도 늘 창틀이 있다.

그렇게 그의 풍경은 그에게 있어 외부 세계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창문 밖 ‘풍경’ 만 있거나 갑갑한 창틀 너머 빛과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던 그의 작품에 변화가 생겼다.

풍경과 창틀이 혼합되더니 급기야 창문 안쪽의 공간도 풍경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프레임과 빛만 남게 되었다.

_최창희(미학·장애인예술 연구자)

최근 실재 창과 빛을 이용한 아트 박스 작업을 하는 의도는

신체적 한계를 오판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노동을 하는 행위가 큰 무리로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이에 페인팅이 아닌 보다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연구하고자 함이며 보다 근본적으론 태양광에서 느꼈던 실재 감성과 더 나아가 물성을 재현하며 경험과 감정을 대중과 공유하는 일에 그 목적을 둡니다.

‘연결의 형상들: Shape of Connection 작업은

공통된 대상을 공유해도 서로 다른 큰 갭을 야기한다 생각합니다. 특수성, 장애, 다른 문화는 개성이 되었고 이 차이점은 나에게 개인사이자 공공화할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 적이지만 그렇기에 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

김환 작가와 인터뷰를 하며 그의 이상은 하늘 위의 理想이 아닌 우리 현실 속의 異常을 평범 함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김환의 대표작. 그날따라 건물들이 하늘색이 되었다. ©한국장애예술인협회김환의 대표작. 그날따라 건물들이 하늘색이 되었다.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김환의 대표작. 중앙역 4호선. ©한국장애예술인협회김환의 대표작. 중앙역 4호선.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김환의 대표작. 새롬케어웍스. ©한국장애예술인협회김환의 대표작. 새롬케어웍스.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김환의 대표작. 한라산 국립공원4. ©한국장애예술인협회김환의 대표작. 한라산 국립공원4.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김환

목원대학교 미술·디자인대학 미술학부 서양화 전공 목원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서양화 전공

2019 춘천예술상 신인상, (사)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

개인전 2022 Frame(서울, KT & G상상마당 홍대갤러리 5F) 2019 호박에 줄 긋는 다고 수박되는 거 아니지만 맛있어요, 춘천미술관, 춘천 2019 신체의 지각, 잠실창작스튜디오 하늘연, 서울 2017 아트랩 대전 소수자를 바라보는 소수자, 이응노미술관 신수장고 M2 프로젝트룸, 대전 2016 부유하는 풍경(석사청구전), 우연갤러리, 대전

단체전 2023 연결의 형상들 Shape of Connection(서울, 신한갤러리 역삼) 2022 모두의 미술 ‘상+생’(강원,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장) 2022 제61회 춘천미술협회전 “전통의 재해석”(강원,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장) 2022 강원작가트리엔날레2022(강원, 평창군 진부면 송어축제장 및 진부시장 일대) 2022 <제로썸씽zero-something>(강원,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장) 2022 이음으로 가는 길 The Way to the Eum(No Limits in Seoul 2022 노리미츠인서울 전시 프로그램)(서울, 이음센터 2 층) 외 다수

아트페어 2022 개나리아트페어(강원, 개나리미술관) 2021 십이지술(十二支術)(강원, 갤러리문) 2021 조형아트서울 PLAS(서울, 코엑스 B1, B2홀) 2020 조형아트서울 PLAS(서울, 코엑스 B1, B2홀) 2019 조형아트서울 PLAS(서울, 코엑스 B1, B2홀) 2016 대전국제아트쇼 2016 청년작가 특별초대전(대전무역전시관) 2015 아시아프ASYAAF(서울, 문화역서울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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