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정 작가 ©최윤정최윤정 작가. ©최윤정

오 남매의 셋째 딸

최윤정이 태어난 1959년은 한국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타인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각박했던 시절이다. 윤정은 서울 신촌에서 4녀 1남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요즘으로 표현하면 뇌병변장애가 있었다. 당시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엄마가 임신했을 때 많이 아파서 먹은 약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위 작은언니 또한 같은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당시는 팔자론이 더 우세했다. 언니는 3세 때 황달로 심한 뇌병변장애가 생겼다. 어머니는 보채던 언니를 품에서 떼어놓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언니를 품에서 놓지 못하셨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 오 남매 모두 학교에 보내기 힘들었다. 비장애인 형제부터 학교를 보낼 수밖에 없던 엄마는 ‘나중에 꼭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였지만, 형제들이 모두 졸업을 해도 윤정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의 가방을 한 번씩 메어 보고, 어깨 너머로 책을 읽는 것이 윤정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학교를 너무 다니고 싶어서 많이 울었어요. 나중에 어른이 돼서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널 가르쳐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형편이 되지 않아 학교를 보내지 못했던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더 아팠을까? 엄마가 돌아가신 지 15년이 넘었는데, 그 생각만 하면 지금까지 아파요.”

장애인 딸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키워야 했던 엄마의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를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런 상처를 꺼내 놓았다.

“그때는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흉이 되었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언니와 저를 방안으로 몰아넣으면서 나지막하게 ‘미안하다.’라고 하시던 어머니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죠. 우리를 숨겨 놓고 나머지 형제들을 인사시키는 모습에 저도 따라 울곤 했습니다. 그 여파로 아직도 오남매 중 언니와 난 유령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 표현으로 시인이 되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평범한 일상이 윤정에게는 간절한 소망이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녀는 글을 썼다. 손의 장애로 자신의 생각을 간결하게 기록했던 것인데 그것이 시가 되었다. 윤정의 생각노트가 한 권 두 권 쌓여져 갔다.

지금 읽어 보면 글도 시도 아니지만 그렇게 열심히 썼던 것이 작품 활동의 밑바탕이 됐다.

윤정이 시인으로 첫발을 내딛은 것은 그녀의 작품을 보고 공모전에 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고 난생처음으로 공모전에 응모한 시 <창문>으로 제3회 곰두리문학상 가작에 당선된 후, 그녀는 ‘이제부터는 이게 내 길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얼룩진 창문에 새벽 비는 언제나 그렇듯 영롱한 아침 무늬가 돼 버린다’로 첫 행을 시작하는 시이다.

그녀는 전동휠체어 덕분에 외부 활동을 한다. ‘글마을’이란 모임에서 시작(詩作)과 관련된 이론 수업을 받았고 작품에 대한 토론도 했으며 시 낭송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녀가 외부 활동에 열심인 이유는 장애인도 사회구성원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윤정의 일상은 ‘작은 창문 밖 세상보기’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을 바라 보며 일상생활을 기록했다. 그러던 중 문복희 시인이 윤정의 글을 보고 ‘시집을 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아직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다.’고 거절하며 돌아왔지만, 지루한 일상 속에서 문득 ‘한번 해 볼까?’란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120여 편의 시를 문 시인에게 보여줬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첫 시집이 「그리움은 안개가 되어」이다.

그 후 「그리움은 영원히」, 「또 다른 그리움」, 「고양이」에 이어 시집 「다섯 식구」가 2021년 발간되었다. 이 시집은 최윤정 작가의 일러스트로 디자인하여 작가의 재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집이다.

고양이 같은 사랑하기

그녀는 ‘비가 오던 날 새벽 내 방의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니 꼭 내 마음 같았다.’는 말로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살짝 내밀었다. 당시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될까 봐 연인을 떠나보내고 사랑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가끔 전화가 왔는데 옛날 감정이 생각나게 될까봐 받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냥 친구가 되었죠.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고 할까요.”

살금살금 다니는 고양이, 겁먹은 눈이 자신의 모습과 같았다는 최윤정의 시 <고양이>는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면 사람들이 무서워 피하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은 이 작품으로 2016년 문예지 『화백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작품 고양이 와 시인 ©최윤정작품 고양이 와 시인. ©최윤정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 주고 있는 활동보조인 조성락 씨는 그녀의 하나뿐인 반쪽이다. 10년전 활동보조를 하며 만난 두 사람은 물 흐르듯 인연을 이어 오면서 늦깎이 사랑을 키우고 있다. 그녀에게 주스를 먹여 주고, 언어장애가 있는 그녀의 말을 대신 전해주는 성락 씨를 ‘다정하지는 않은데 날 끔찍이 생각해요.’라고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안마원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방문 안마를 받을 때 보조원으로 와서 안마를 해 주고 갔어요. 그때는 내 눈에 성락 씨는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안마를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활동보조인이 되어 티격태격하다가 눈 깜빡 하니까 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네요. 이제는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 가게 되었고, 보이지 않게 서로 감동도 주고받고는 합니다.”

주위에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하의 남자와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는 최윤정 시인을 부러워한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것도 문학 덕분이다. 글로 표현한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진실한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최윤정 작가의 비상

늦은 나이에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숭실사이버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여 배우지 못한 한을 풀었다. 사회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가 되어 이제는 자기 표현을 마음껏 하고 있으니 소통의 한도 풀었다.

그녀의 또 하나의 이름은 ‘일러스트레이터’다.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시각적 요소로 표현하는 삽화나 캐릭터 작업을 한다. 손에 장애가 있는 그녀는 모양자를 들고 네모, 세모, 동그라미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몸이 심하게 흔들릴 때는 활동보조인이 옆에서 자를 잡아 준다. 색연필로 제작한 그림을 물품으로 제작해 선물하거나 직접 팔기도 하는데 미소 화장품 케이스 디자인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최윤정 작가는 이런 현실을 “수입은 없다고 보면 돼요. 참 안타까운 현실이죠. 장애예술인들도 비장애예술인과 똑같이 노력해서 창작을 하는데 기회가 없어요. 이젠 인식이 바뀔 만한데 아직까지 편견의 벽은 높아요. 장애를 하나의 개성으로 봐줬으면 좋은데.”

작업 중인 최윤정 작가. ©최윤정작업 중인 최윤정 작가. ©최윤정
미소화장품 디자인 ©최윤정미소화장품 디자인. ©최윤정

최윤정의 호 우여(羽如)는 깃털처럼 날아오르고 싶은 작가의 자유의지가 담겨 있다. 이 자유가 어찌 작가 혼자만의 꿈이랴. 아직도 집안에만 있는 둘째 언니가 바깥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기를, 그리고 장애예술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기를 더 나아가 모든 장애인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황동규·윤동주 시인을 존경하는 최윤정 작가는 ‘지금까지는 내 마음을 표현하는 글을 많이 썼는데 앞으로는 남의 마음을 이해하는 글, 고마워할 줄 아는 글을 쓰고 싶다.’고.

그녀의 문학적 소망도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 최윤정 대표작

기도

낮아지는 언덕길

야윈 눈길 마주치면

 

시린 가슴 못 잊어

깊은 밤 두 무릎 꿇는다

 

몸 바쳐

사랑했던 부활

천년의 삶 기다린다

 

풀잎은

수면 위에 달빛이 비친다

촉촉이 아침을

다듬는 이슬이 건반에서

통통통

건너고 있다

풀잎은 가수처럼 노래를 부른다

 

다섯 식구

하늘에 떠 있는

큰 별 둘 작은 별 셋

사랑으로 모여서 식구처럼 지내더니

 

나란히

한 줄로 서서

다섯 식구 되었네

 

철새

울지 마라 달래면서

날아간 철새들

오늘도 네 이름 부르다가

그리워한다

 

네 등에

내가 타고서

사계절을 부둥켜안는다

 

작은 아낙네

보이지 않았던 볕 창문을 열었더니

별난 세계 신기한 듯 땅거미 넋 잃는다

 

발밑에

어둠 내리고

눈 뜨고서 보지 못한

 

뜨겁게 잘못 비는 아주 작은 아낙네

상처 난 멍든 시간 그 심장 안아 본다

 

사모의 숲

그리움이 가득히

싸여 있는 사모의 숲

 

하얀 별이 쏟아지면

그대 자취 찾아서

 

둥그런

태양이 누운

첫 새벽 기도하리

 

최윤정

2016 숭실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입학(전공) 2020 숭실사이버대학교 졸업 2021 장애인 인식개선 사내강사 자격증 취득 2023 동료 상담가 활동 솟대문학, 은평시창작, 초우문학 회원

수상 1993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가작 2003 자오문학상 우수상 2010 미술 공모 입상(화가협회 등록) 2017 화백문학 등단

저서 1996 「그리움은 안개가 되어」 2001 「또 다른 그리움」 2003 「그리움은 영원히」 2011 「휠 앤 필」 2017 「고양이」 2018 2인 시조시집 「종이학」 2021 시화집 「다섯 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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