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비보이 김완혁. ©김완혁한발 비보이 김완혁. ©김완혁

다리를 잃고 기회의 땅으로

낮에는 공익 근무, 밤에는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다. 소집 해제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쯤 그는 이상하리만치 큰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조용했던 그에게 24세, 갑자기 찾아온 성격 변화로 이때만큼은 누군가 싸움을 걸어와도 다 이길 수 있겠다는 무모함이 있었다. 아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다들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같아서 ‘아, 내가 잘난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토바이는 절대 안 된다는 어머니 말은 듣지 않고 열심히 모은 돈 80만 원으로 큰 중고 스쿠터를 사서 타고 다닌 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였다. 새벽 늦은 시간, 아무도 없는 강원도 원주의 강변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최고 속력으로 달려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속 100km가 넘어가는 계기판과 도로를 번갈아 보던 중 직진 도로만 펼쳐지리라 생각했던 그는 예기치 못한 커브길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뒤로는 차가운 도로 바닥의 끔찍한 기억뿐이다.

오토바이 사고는 죽거나 살거나일 만큼 위험한 사고라는데, 이날 그는 인도의 경계석을 밟고 튕겨 나가 앞에 있는 전봇대에 다리를 심하게 부딪쳤다. 그렇게 자신에게는 일어날 리 없을 것 같던 사고가 일어났고,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다리 하나를 잃었다. 

제대 후 계획은 대학 생활을 잘 마친 후 회사에 들어가 평범한 사무직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애인이 되자 복학부터 걱정이었다. 학교의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 막막했고, 교수님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창피했던 것같다.  

사실 마음속에는 고등학교 1학년부터 계속해 왔던 춤, 비보잉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물다섯, 춤을 다시 시작하기엔 나이도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미 많은 걱정을 끼친 가족들에게 춤을 추겠다고 하기엔 염치가 없었다.

퇴원하며 용기가 필요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 끝에 일단 큰 캐리어에 짐을 쌌다. 완혁은 어렸을 때부터 살던 할머니 댁인 강원도 원주를 떠나 서울에 가기로 결정했다. 회사 취업이든 비보잉이든 기회는 서울에 많기 때문이다. 오른발엔 의족, 왼팔에는 목발을 짚고 버스를 탔다. 함께 춤추던 형님의 배웅을 받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혼자 몰래 좀 울었다. 힘들게 결심한 만큼 멋지게 살아 내겠다고 다짐했다.

26세 그때까지 그는 혼자 살아 본 경험이 없었다.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 보고자 나온 것이었으니 바로 일을 해야 해서 미리 자격증 두 개를 따 두었다. 컴퓨터 그래픽 기능사와 웹디자인 기능사, 둘 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주로 쓰는 디자인 관련 자격증이었다. 대학에서 디자인 관련 학과를 전공했기 때문에 그나마 자신 있는 자격증이라 금방 딸 수 있었다.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은 취업과 퇴사의 반복이었다. 완혁은 좀 조용하고 미련하기 때문에 사회생활에 애를 먹기 딱 좋은 성격이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얘기하지 못해서 혼자 속을 썩이다 갑자기 퇴사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과정에서 상처를 받아 우울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좌-친구들과 함께, 우-청춘마이크 공연. ©김완혁좌-친구들과 함께, 우-청춘마이크 공연. ©김완혁

내가 정말 춤을 잘 추는가

비보이를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내향적이던 완혁은 학교 복도에서 친구들이 연습하는 비보이 동작들을 보고 집에서 몰래 연습하여 실력을 키웠다. 용기를 내서 들어간 댄스 동아리에서 방과 후 매일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연습하는 게 좋았다. 2000년대 후반, 한국 비보이가 엄청난 전성기일 때다. 그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가서 멋진 비보이가 되고 싶었고, 나름 열심히 연습해서 공연도 하고 여러 비보이 대회에도 참가해 봤다.

하지만 좋은 결과는 없었다. 실력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 비보이들의 실력은 대단 하고 벽이 참 높았다. 졸업할 즈음이 되자 그는 비보이의 꿈을 접고 어느새 다른 친구들과 같이 대학교 일반 전형에 지원서를 쓰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오히려 장애인이 되고 나서 다시 프로 비보이를 꿈꾸게 됐다. 사고 전엔 운동 이나 러닝머신으로 땀을 흘릴 수 있었지만, 걷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니 두 다리로 활기차게 몸을 움직이며 활동했던 때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러나 그가 비장애인일 때부터 비보이를 했었단 건 큰 행운이었다. 서울로간 것도 비보이를 하기 위해서였고, 멀리 있는 연습실까지 버스와 지하철로 열심히 움직이는 동력도 비보이를 하기 위해서였 으니 말이다.

장애인이 된 지 1년 조금 넘었을 무렵, 의족에 적응하고 꽤 잘 걷게 됐다. 프로 비보이 팀에 들어가 매일같이 홍대입구역 부근 으로 연습을 다니던 어느 날 팀 동료에게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지 않겠 냐는 권유를 받았다. 이후 완혁은 〈스타킹〉 을 비롯해 말로만 듣던 유명 TV 방송에 출연하게 됐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카메라들이 자신을 찍었고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많은 연예인과 관객 앞에서 춤을 추고 마이크를 들고 준비된 대사를 말했다. 방송이 나가면 페이스북에 친구 신청이 들어왔다. 포털 창에 이름을 검색하면 뉴스 기사들이 떴다.

솔직히 완혁은 방송 출연 당시 사고 전과 춤 실력은 똑같은데 다리만 하나였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춤은 전에 했던 기술들을 다시 살린 정도로 이 또한 걸음마 단계였다.

방송 출연과 공연들은 물론 좋은 취지였지만 대단한 사람이 돼야 한단 생각에 심리적인 부담감이 계속 쌓여 갔다. 춤을 추러 서울로 온 후 2년 정도는 매일 세 시간 정도 연습했는데, 연습을 많이 한 날에는 근육통이 심해서 자다가 화장실에 갈 때면 기어가기도 했고, 다리를 못 쓰게 되다 보니 팔을 많이 쓰게 돼서 팔꿈치에 퇴행성 관절염이 생겼다.

춤추는 것 자체를 즐기지 못했고, 연습할 시간이나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등 스스로에게 여러 핑계를 대는 날이면 스트레 스를 받았다. 춤이 재밌지 않았고 자신이 춤추는 영상이 방송으로 나와도 어색하고 민망해서 잘 안 봤다.

〈비디오머그〉의 인터뷰에서 ‘다른 비보이들이 실수하거나 넘어지면 웃을 수도 있겠는데, 제가 넘어지거나 실수하면 관객 입장에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할 것 같다.’라는 얘기를 했었다. 그는 공연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많은 시선들이 진지하다고 느꼈다. 그는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 많은 박수와 관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한 장애인이 춤을 춘다.’라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공연 모습 .©김완혁공연 모습 .©김완혁

춤이 정말 좋아서 하는 걸까

비보이를 시작한 지 15년, 한발 비보이가 된 지는 8년이 됐다. 스스로를 ‘비보이 김완혁’이라고 소개하지만 필요할 때는 ‘외발 비보이 김완혁’이라 소개한다. 앞에 ‘국내 유일’이 붙을 때도 있는데 뭔가 거창해서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하진 않는다.

이때까지는 섭외가 들어오면 거기에 맞춰 공연하는 식이었지, 자신이 먼저 공연을 선택한 적은 많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작품을 주도할 기회가 생기면 모든 출연자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평소 다른 작품에서는 자신이 돋보이는 구성이 많다 보니 스스로 공연을 만들 땐 그걸 피하는 편이다. 가장 어려운 공연은 바로 마이크를 들고 스피치해야할 때다. 자신이 춤을 추기만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교훈이 되는 말로 만들어야 할 때 가장 어렵고, 왜그렇게 해야 하는지 참 어색하고 답답할 때가 많다.

춤출 때 남과 경쟁하는 게 비보이 배틀의 당연한 심리겠지만 그는 우선 자신의 불편한 몸과 싸울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과 경쟁할 생각을 못하는 게 경쟁력일 수 있겠다.

춤은 성격을 따라간다는데, 자기 춤엔 정직한 무브들이 많지만 여유와 멋을 잘 표현하지는 못하는것 같다. 비장애인일 때도 그랬고 다른 사람의 춤을 따라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져서, 스스로의 안무는 모두 자신이 짠 동작들이다.

보통 연습할 때 무선 이어폰을 끼고 어떤 동작들이 자신에게 맞고 자연스러운지 가볍게 움직여 보고, 필살기나 욕심이 나는 동작들을 짜는 것은 좀미뤄 두고 있다. 이제 진지하게 시간을 갖고 새롭게 만든 동작으로 활동을 해 보고 싶다.

가끔 ‘춤이 정말 좋아서 하는 것인가?’란 생각을 한다. 초등학생 때 어느 지방의 청소년 댄스 대회에서 비보이를 처음 봤다. 사람이 물구나무로 뛰어서 무대를 가로지르는데 그 장면이 너무 멋있고 신기해서 기억에 남았다.

처음엔 친구들에게 어려운 기술을 하는 스스로를 보여 주고 싶어서 비보잉을 시작했던 것 같다. 자신에게 비보잉의 매력은 굉장히 어려운 기술들로 이뤄진 춤이라는 점이었다. 지금은 비보잉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정해진 것 없이 다양한 춤 스타일과 캐릭터가 나올 수 있는 장르란 것과 장애인인 본인 또한 문제없이 함께 춤출 수 있는 장르라는 점이 좋다. 실제로 세계적인 스트릿댄서 중 유독 비보이 장르에 지체장 애인이 많고 실력도 대단하다.

거리에서. ©김완혁거리에서. ©김완혁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요즘은 댄서 생활 이외에도 재택으로 디자인 업무도 하고,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다. 최근엔 우리금융그룹과 앱솔루트 보드카의 광고 모델로 촬영했다. 비보이 말고도 하고 싶은 일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의 심리를 알고 싶어서 심리학 공부를 해 보고 싶다. 자신과는 다른 고충이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 보고 싶어서 상담사가 되고 싶단 생각도 해 봤다. 또 춤을 함께 연습하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기도 하다.

감사하고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그에 따른 책임들이 꼭 있다. 정말 집중해야 할 공연 이나 활동이 있다면 다른 일이 들어와도 그 제의를 거절해야 하지만, 그는 본디 거절에 약한 사람이다. 원래 성격도 그렇지만 어쩌면 자신 또한 장애로 인해 더욱 선하고 바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신경쓰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제 그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로 일을 하고 싶다.

스텔라 영은 한 강연에서 “장애인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감이나 감동을 주기 위해 존재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감명 깊은 말이었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자신을 지금 영감 이나 감동을 주는 사람이 돼 있다.

자신 또한 장애인인 스스로를 엄청난 노력, 극복, 정신력 등의 키워드에 가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르게 받아들이려 한다. 춤을 추는 예술가로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좋은 영감이나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열심히 살아갈 하나의 원동력이 다.

하지만 ‘장애인을 동정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너무 깊어지면 오히려 역차별이 생긴다고 느꼈다. 일터에서는 당연히 자신이 장애인이라서 열외가 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한다.

예를 들어 모두 열심히 짐을 나르는 상황이면 그도 당연히 짐을 든다. 하지만 굳이 안 그래도 된다고 판단되면 짐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불편할 수도 있다. 그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인 건 사실이기 때문에, 모든 걸따라가려 하면 지친다. 해야 하는 일과 안해도 되는 일을 스스로가 먼저 정하는 게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낫다.

한번은 퇴사 이후 식사 자리에서 만난 선배에게 ‘장애인이라고 해서 봐주면 안된다.’는 생각에 일부러 모질게 대했다는 얘기도 들어보았다. 회사에 다닐 때 이 선배의 보조 역할을 하며 많이 혼나고 핀잔도 많이 받았지만 그런 솔직한 얘기를 들으니 고마웠다.

자신의 사고에 대한 얘기나, 비보이 공연을 보고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공감해 주는것 같아 고맙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춤을 추어야 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한발 비보이 김완혁. ©김완혁한발 비보이 김완혁. ©김완혁

김완혁

한 다리로 춤을 추는 비보이다. 2013년 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것이 고등학생 때 포기한 비보잉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2020년부터는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에서 모델 활동을 겸하며 우리금융그룹, 앱솔루트 보드카 등의 CF에 출연한 바 있다. 현재 댄스 크루 부블리검프스(Bubbly Gumps) 소속으로 활동하며 유튜브 채널 ‘곰감동님’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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