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생은 대학 졸업 후, 약사로 근무를 하다가 돌연 미국을 가겠다며 선언을 했다. 엄마는 왜 그 좋은 직업을 버리고 미국으로 가느냐며 말리셨다. 하지만 동생은 더 넓은 세상을 가고 싶다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어메리칸 드림이 늘 있으셨던 아빠 덕분에 우리집의 유일한 영주권자였던 동생은 미국을 가기도 쉬웠다. 그런데 덩달아 나도 따라가겠다고 나섰으니 엄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엄마의 걱정을 뒤로 하고 나와 동생은 2006년에 미국을 가게 되었다. 나는 모아서 가져간 돈이 떨어지기도 했고, 여름에 욕창이 생겨서 치료를 해야 했다. 그러나 비영주권자가 병원을 가기는 너무 비싸고 힘들었기 때문에, 8개월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동생은 그 뒤로 지금까지 미국에 살고 있다. 나는 그때 고작 어학원과 자원봉사단체 등을 다니며 영어를 아주 쪼금 배운게 다였지만, 동생은 뉴욕대학교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동생은 힘들다는 투정이나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나조차도 동생이 얼마나 힘들게 대학원을 입학해서 다니고 졸업을 했는지, 또 직장을 구했는지 잘 모른다. 그냥 대견하고 기특할 뿐이다.​

동생이 뉴욕시립병원에 취직을 하고도 엄마는 동생의 결혼 걱정때문에, 늘 한국에 들어오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그러나 동생은 온순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어쩌면 나보다 훨씬 고집이 센 아이인 것 같다. 엄마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10년을 버티고 지냈다.​

그러다가 동생은 지금의 제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동생과 제부가 연애를 한지 1년 쯤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지난 칼럼에 썼던 37일간의 미국, 캐나다, 멕시코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제부를 처음 만났는데, 교포2세인 제부는 당시에 한국말을 '네, 아니오, 그렇죠, 감사합니다.' 정도 밖에는 못했지만, 인상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동생과 죽이 척척 맞는 모습에 서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 상견례할 때, 동생과 제부, 현혜. ⓒ박혜정부산에서 상견례할 때, 동생과 제부, 현혜. ⓒ박혜정

우리가 그들을 여행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결혼 얘기는 나오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인연이었던지 그 뒤로 결혼 얘기가 오고 가면서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제부의 부모님이 부산에 오셔서 함께 여행을 하며 상견례를 했다. 그리고는 그 해, 2018년 11월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동생과 제부 둘다 미국 시민권자이고 미국에서 지낼거니까, 결혼식은 미국 뉴욕에서 정식으로 하고, 한국의 가족들은 뷔페를 하나 빌려서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결혼식을 앞둔 3일 전, 부모님과 우리 가족, 이모 1명, 사촌 2명은 미국 뉴욕에 도착했다. 일반적인 미국의 결혼식은 거의 일주일 동안 파티식으로 진행된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고 3일 정도로만 진행했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 점심은 결혼식 리허설 파티와 식사, 저녁은 한국식 폐백을 했다. 결혼식 리허설에는 신랑 신부의 들러리들, 친구와 지인들이 오는 행사였다. 한국식 폐백에는 신랑 신부의 가족, 친지들이 와서 한국에서와 똑같은 폐백을 했다. 여기까지는 리허설을 하는 것 빼고는 특별한 게 없었다.

뉴저지의 한국 식당에서 결혼식 전날 했던 폐백. ⓒ박혜정뉴저지의 한국 식당에서 결혼식 전날 했던 폐백. ⓒ박혜정

드디어! 결혼식 당일 날이 되었다. 식은 오후 3시였지만 아점을 먹고부터 나도 너무 바빴다. 관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랑 신부의 친자매, 친형제가 있는 경우 신랑 신부의 메인 들러리로 서야하기 때문이었다.​

들러리가 뭐하는 건지 미드를 통해 본 게 다였던 나는, 또 신부의 메인 들러리인 메이드 오브 아너(Maid of Honor)는 뭘하는 건지 몰라서 걱정이 좀 되었다. 찾아보니 신랑들러리 중 메인 들러리인 베스트맨(Best Man)은 신랑에게 결혼반지를 건네주는 것이고, 신부들러리들은 서있는 것이 고작이지만 신부의 '보디가드'로서 악귀로부터 신부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더 중요하다고 했다. 더군다나 신부의 메인 들러리는 결혼식 후 파티에서 '메이드 오브 아너 스피치'를 해야한다고 해서 부담이 많이 되었다.​

동생이 마련한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메이크업과 헤어를 하고 나서. ⓒ박혜정동생이 마련한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메이크업과 헤어를 하고 나서. ⓒ박혜정

어쨌든 메이드 오브 아너로서 동생이 마련한 드레스를 입고 아침부터 메이크업과 헤어를 신부처럼 받았다. 그리고 결혼식 전에 신부 들러리들은 모두 신부와 추가 야외 촬영을 하기 위해 작은 버스를 타고 나갔다. 뉴욕 맨하튼 근교 롱아일랜드시티 이스트강을 배경으로 신부들러리들은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몇 컷의 사진을 찍으며 내 인생 최고의 사진이 나왔다는 사실~!ㅎㅎㅎ 너무 자연스럽고 이쁘게 잘 나와서 흐뭇하다. 메이크업과 헤어, 드레스도 전체적으로 다 이쁘게 나와서 너무 마음에 들었다.

롱아일랜드시티 이스트 강에서 신부와 들러리들의 추가 촬영. ⓒ박혜정롱아일랜드시티 이스트 강에서 신부와 들러리들의 추가 촬영. ⓒ박혜정

이제 오후 3시, 한국과 비슷한 결혼식이 시작되었는데, 진행 순서가 한국과는 조금 달랐다. 우리나라와 같은 주례는 없고, 제일 먼저 사회자가 먼저 입장을 한다. 그 뒤에 베스트맨과 메이드 오브 아너가 입장을 하면서 차례대로 나머지 들러리들이 입장을 한다.

결혼식의 시작을 여는 메인 들러리 입장. ⓒ박혜정결혼식의 시작을 여는 메인 들러리 입장. ⓒ박혜정

그리고는 화동, 플라워걸들이 꽃잎을 뿌리며 귀엽게 들어온다. 다음으로 신랑 입장 후 친정 아버지와 신부가 입장하는 순서이다. 그 다음은 성혼선언문 낭독, 결혼 반지 끼워주고 신랑 신부의 키스, 행진 등으로 한국과 비슷했다.​

귀여운 화동들이 결혼식을 더 빛나게~. ⓒ박혜정귀여운 화동들이 결혼식을 더 빛나게~. ⓒ박혜정

이런 결혼식이 끝나고 미국의 결혼식은 이후가 진짜인 것 같았다. 루프탑 파티를 시작으로, 저녁을 먹으며 댄스 파티와 이벤트 파티가 거의 밤새도록 열렸다. 루프탑 파티는 에피타이저 음식들과 샴페인, 와인 등으로 야경을 즐기며, 신랑 신부가 올라와서 결혼식에 온 사람들에게 한명 한명 인사를 하는 것이다.

신랑 신부의 들러리들과 찰칵, 루프탑 파티에서. ⓒ박혜정신랑 신부의 들러리들과 찰칵, 루프탑 파티에서. ⓒ박혜정

그 뒤에 있는 메인 파티에서는 저녁을 먹으며 드디어 내 차례~ 메이드 아너 스피치를 떨리는 마음으로 하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유창한 영어로 하고 싶었지만, 앞에 축사인 3~4 문장만 겨우 영어로 외워서 하고 나머지는 천천히 한국말로 그냥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했던 메이드 오브 아너 스피치. ⓒ박혜정떨리는 마음으로 했던 메이드 오브 아너 스피치. ⓒ박혜정

그리고는 신랑 신부의 댄스와 친구 지인들의 댄스 파티, 신랑 신부와 부모님의 댄스 파티가 계속 펼쳐지고, 부케 받기, 스티커 사진 찍기, 웨딩 케이크 절단식 등의 이벤트가 이어졌다. 이 파티는 사실 끝나는 시간이 없이 계속되는 것 같았지만, 모두들 체력의 한계가 왔는지 새벽 1~2시쯤 끝이 났다.​

계속되는 결혼식 파티. ⓒ박혜정계속되는 결혼식 파티. ⓒ박혜정

결혼식 다음 날도 신랑 신부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 거의 들러리들의 뒷풀이 파티가 이어졌다. 미국에서 결혼식을 하려면 보통의 체력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ㅋㅋㅋ 함께 들러리를 했던 이들과 신랑 신부를 마지막까지 축복하며, 즐거운 시간을 또 밤새도록 보냈다.​

마지막 신랑 신부의 케잌 컷팅식. ⓒ박혜정마지막 신랑 신부의 케잌 컷팅식. ⓒ박혜정

동생의 얘기를 들어 보니, 미국의 결혼식은 우리나라처럼 식장만 예약하면 모든 게 자동으로 다 되는 시스템이 아니라고 한다. 식장, 예복, 메이크업, 헤어, 사진사, 식사, 웨딩촬영 등 일일이 다 따로 신랑 신부가 알아보고 예약을 해야 한단다. 그러니 미국에서 결혼을 준비하는 기간이 대부분 1년 정도를 잡거나 아무리 짧게 잡아도 6개월 이상은 알아봐야 한다고 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결혼식은 내가 해본 바로는 식장만 잡으면 거의 간단하고 손쉽게 결혼식을 할 수 있다. 복잡하고 결혼 예식 조차도 며칠씩 하는 미국의 결혼식이 좋다, 안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각 나라의 문화일 뿐이다.

​단지 나도 동생 덕분에 미국의 결혼식을 경험할 수 있어서 색다르고 즐거웠다. 그리고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메이드 오브 아너(Maid of Honor)를 하게 되어서 내 결혼식 보다 더 떨었던 것 같다. 파티와 같았던 미국의 결혼식은 체력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특별한 경험이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휠체어를 타고 메인 들러리를 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준 동생에게 감사를~. ⓒ박혜정휠체어를 타고 메인 들러리를 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준 동생에게 감사를~. ⓒ박혜정

동생과 나는 4살 차이가 난다. 내가 다치기 전에는 동생이 어렸고, 일하시는 엄마를 대신해 엄마같이 언니같이 많이 챙겨주었다. 다치고 난 뒤에는 챙겨주지도 못했고 함께 할 시간이 없었다. 동생이 사춘기를 겪는 시절에 나는 오랜 병원 생활 후에 바로 대구로 대학을 가버렸고, 내가 부산으로 내려왔을 때는 동생이 서울로 대학을 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동생에 대한 마음이 좀 애틋한데,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그런데다 지금은 같이 오순도순 지내고 싶지만, 17년째 미국에 있으니 그럴 수도 없다. 물리적인 거리만큼 애틋한 마음은 더 가득하다. 하지만 우린 성격이 너무 달라서, 동생도 그런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겠지?ㅎㅎ. 나는 자매끼리 서로 아껴주고 더 가깝게 지내지 못해서 아쉽기만 하다.

5년 전 결혼해서 원하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너무 힘들어하는 동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하늘이 꼭~! 이쁜 아기를 동생에게 주시길. 그리고 너무 힘들어 하지 말길.

​글을 쓰면서 사랑하는 동생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언니로서 곁에서 힘이 되주지도 못하고, 마음만 한가득이다. 얼른 봄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동생을 위해 끄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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