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원 작가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마지막편에서 우영우는 이런 말을 한다. “길 잃은 외뿔고래가 흰고래 무리에 속해 함께 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외뿔고래와 같습니다. 낯선 바다에서 낯선 흰고래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모두가 저와 다르니까 적응하기 쉽지 않고 저를 싫어하는 고래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게 제 삶이니까요.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장애관은 다양성 인정에 맞추어져 있다.

장애인 당사자를 직접 출연시킨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는 장애인의 미디어 접근성을 높였다는 의미가 있어 당사자성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된다. 극중에 등장한 장애인관은 장애인의 능력 인정을 보여주고 현실을 잘 다루고는 있지만, 주체성이나 자립성은 실패하고 있어 보인다. 차후에 이를 자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오늘은 노희경 작가의 2016년에 방영된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어떤 장애인의 모습을 보여주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이 드라마는 초등학교 동문들인 노인들의 이야기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인이 되면 동반되는 것이 장애이다. 장애를 맞이해야 하는 입장과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입장, 가족으로서의 입장, 장애인을 사랑하는 연인으로서의 입장 등이 다채롭게 나타난다.

완이의 삼촌 인봉은 전기공사를 하다가 산재로 인하여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완이 할머니가 인봉에게 운동을 해야 한다며 들로 가지 말고 오르기 힘든 산으로 가라고 한다. 인봉이 산으로 간다고 하자, 귀가 어두워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들로 간다고?’라며 되묻는 장면이 있다.

귀가 어두워서만이 아니라 비장애인 가족과 장애인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부에서 노인들이 영정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완이가 엄마 난희에게 영정사진을 왜 찍느냐고 묻자 난희는 ‘난 뭐 안 죽냐?”라고 답한다. 사람은 모두가 시한부라고 말한다. 이는 모두가 예비적 장애인이라는 말과 같다. 노인이 되면 동반되는 장애와 질병이 두렵고 죽음이 두렵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삶을 영위한다. 시한부이지만 지금은 골로 가는 것보다 집에 밭일이 더 급하다고 말한다.

완이의 연인 연하는 슬로베니아에 산다. 완이가 유학시절 만나 연하와 결혼을 약속하였으나, 연하는 교통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완이는 장애인과 유부남은 사귀어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 난희의 말에 의해 슬로베니아를 떠나왔지만, 영상으로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다. 어린 시절 완이를 데리고 난희가 남편의 외도로 약물 동반자살을 시도한 바 있어 완이는 그때부터 자신의 생명은 엄마의 것이라 받아들이고 있어 난희의 반대를 거절하지 못하고 연하를 떠나온 것이다.

완이와 연하의 영상통화에서 연하는 다리를 못 쓰니까 진짜 너무 불편하다고 말한다. 다치기 전의 다리가 그립다고 말한다. 완이는 잊으라고 답한다. 비장애인이었을 때의 자신을 잊으라는 것과 그립다는 말에서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위해 잊어야 함과 비장애인의 삶에 대한 그리움이 서로 교차된다.

그 그리움은 다리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지만, 완이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잊으라고 한 완이도 나도 너의 다리가 그립다고 말하며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끔찍한 사고를 연상시키는 상처라면 잊고 싶을 것이고, 행복했던 기억을 찾고 싶으면 그리울 것이다. 완이는 사고 당시의 장면을 잊을 수 없어 자신의 거울을 어떻게 해 달라며 선배 동진에게 호소한다.

난희 친구 희자가 치매에 걸리는데, 아들 민호가 솜사탕을 들고 자는 엄마를 안으면서 솜사탕이 입안에서 녹아 사라지듯이 언젠가 엄마를 더 이상 안을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긴다. 완이는 엄마 친구들을 이모라고 부르는데, 정아 이모와 희자가 차를 타고 가다가 짐승을 치는데 사람을 친 것으로 알고 자수를 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낼 모래 죽을지도 모르는 노인네를 친 게 큰 대수냐 생각하며 처음에는 자수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의 죽음은 애틋하고 남의 죽음은 중요하지 않은 내로남불과 가족의 죽음에 대한 반응과 당사자의 반응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내로남불은 장애인관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완전히 남일 때는 자선의 대상, 가까운 사이일 경우에는 좋은 사람 만나 장가가라고 하지만, 자신의 가족과의 결혼은 절대 안 되는 입장이 된다. 극적으로 흥미를 주기 위해 노인들을 꼰대들이라 표현하고, 완이를 개딸(엄마에게 만만하게 대하면서 동등한 입장에서 대드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행동하게 하지만 이런 내로남불의 구도는 끝까지 유지해 나간다.

드라마의 OST도 상징적이다. 린이 부른 주제곡 ‘바람에 머물다’는 바람에 있는 곳에 사람이 머문다는 의미이다. 가사에서 “바람이 불어 눈 감으면 기억은 간절한 그리움으로 머물러 쉰다. 나를 감싼다. 살며시 어루만진다. (중략) 모두 다 사라져도 부는 바람만은 내 곁을 머문다.”란 가사가 나온다.

사람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머문다고 하였다. 같이 있는 것은 바람이 머물든 내가 머물든 같은 것이다. 바람은 공기의 움직임이다. 머물러 있으면 공기일 뿐, 바람이 아니다. 그러나 나를 감싸는 것은 머무는 것이고, 사라져 지나가도 머무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 사라져도 이 세상에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극 중 내레이션에서 ‘인생이란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다는 걸, 죽어서도 뜨거운 화해는 가능하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라고 하였다. 사라짐, 기능상실, 죽음을 앞둔 노인들, 이는 모두 장애의 손상을 초래하고, 이는 사회적 제약을 동반한다. 난희가 완에게 연하랑 왜 헤어졌느냐고 묻자, ‘장애인 됐어. 장애인이랑 결혼하지 말라며’라고 답한다.

난희와 인봉의 대화에서도 사람 구실, 즉 기능상실과 사람을 연관짓는다. 난희가 인봉에게 사내구실은 잘 하겠다고 하자, 밤일도 안 될 까봐? 장애인은 여자 좋아하면 안 되나?라고 답한다. 그리고 장애는 짐(부담)이다.

수술을 열 두 번을 하고, 맨날 돈이 모잘라라고 말하는 대사가 나온다. 완이가 난희에게 어릴 적 동반자살하려고 약을 먹인 일을 말하며 ‘그때 나는 엄마 거구나. 여겼다’며 대든다. 난희가 완이와 유부남 선배 동진과의 사이를 오해하자, 연하를 버린 것도, 막사는 것도 엄마 탓이야라고 대든다. 떠나왔지만 그리움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장애를 부담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저항감을 오해를 받고서야 느낀 것이다.

시청자 댓글에서 난희가 장애인과 유부남은 안 된다는 말에 대해 장애인과 유부남을 동격화한 비하라고 비난하였다. 둘은 안 된다고 하여 둘은 같다는 것은 아니므로 동격취급은 아니다. 안 되는 이유는 다르기 때문이다.

완이가 다시 연하를 만나러 가서 다시 오겠다고 하자, 연하는 내 다리가 좀 불편한 것뿐이지만, 너가 오지 않으면 다리가 싫어질 것 같다며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 심정을 배려하라고 말한다. 완이는 결혼 허락을 받으려면 상체 운동도 더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장애인이 상체 힘이 모자라서 휠체어를 사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재활의 정도를 말하는 재활 패러다임이다.

노인 꼰대 석균이 버스를 타고 여학생에게 일어나라며 자리 양보를 지시한다. 여학생이 내리고 나서 창밖을 보니 여학생 한팔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장애인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편견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연하에게서 걸려온 영상통화에서 딸 대신 통화를 하게 된 난희는 연하에게 밤에 다리 땜에 아플 건데 늘 조심하라고 하고, 여자도 만나라고 말한다. 자기의 딸은 안 되고 남의 딸은 사귀라고 하니 어느 정도의 사이인가에 따라 가치관이 다름을 보여준다.

내레이션에서 인생은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것이 더 많은 남는 장사다. 정말 삶은 축복이고 감사일까? 엄마 친구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바치고 연하에게로 가기로 한 완이가 스토리의 결말이 축복이고 감사로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있다.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난희가 암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사에게 묻는다. 의사는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수술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말한다. 수술이 오히려 생명을 더 단축할 수도 있는 것이 암 수술이지만 가능성은 매우 가치로운 것이다. 희망이고, 인간존중이다. 장애인에게도 상실보다는 현존하는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

난희가 완이를 걱정하자, 왜 내가 엄마 짐이냐고 완이는 말한다. 난희와 정아는 친구 희자가 치매에 걸려 다들 보호자가 되어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이는 짐이 아니라 사랑이다. 이런 사랑이 난희가 연하를 받아들이는 생각에 미치게 한다. 완은 엄마의 암 소식에 자기 사랑탓이냐 하는 모습이 이기심이라 여기며 죄스러워 자기 뺨을 때린다. 암 경력을 갖고 있는 영원은 난희에게 암은 평생간다며 기대는 내려놓고, 희망은 가지라고 말한다.

난희가 암이라는 평생 가는 장애와 같은 경험과 연하가 수술병원을 찾아온 것을 보고 인간됨을 느끼고, 사랑을 갈라놓는 것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 비행기표를 난에게 주며 연하에게 가라고 말한다. 이는 재활 패러다임이 바뀐 것일까? 정성이 감동시킨 것일까? 조금은 그런 뉘앙스가 묻어 있기는 하지만, 마지막 인생이 될 뻔한 경험에서 딸을 보내기로 한 것은 세상을 정리하며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말고 선물을 주는 뉘앙스도 있어 패러다임이 변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부정적 인식은 극 중에서 지적하는 것이지 부정적인 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활이 이루어져 결말이 해피앤딩이 된 것은 아니지만, 운명과 장애를 수용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우영우 드라마에서와 같이 다양성이나 다름의 가치까지 나아가지 못한 점은 드라마에서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