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12년 만에 원정 16강을 이루게 해준 황희찬의 땅볼 슛은 손흥민의 패스로 가능했다. 그는 올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황선홍 등의 다른 공격수와는 달리 결정적인 기회를 만났을 때 간결하게 득점에 성공하는 확률이 높았다. 상대편 선수의 압박엔 스텝 오버 등의 기술로 이를 벗겨내는 등 개인기가 뛰어나다.
그가 뛰어난 개인기를 가지기까지 아버지인 손웅정 씨 역할이 컸는데, 이와 관련된 기사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성적과 타이틀을 얻으려는 어른들 욕심 때문에 기본기 쌓지 않고 어린 선수들을 경기에 내보내는 학부모가 있는 현재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스피드 하나만 믿다 기본기 쌓지 못하고 몸이 망가진 후 은퇴한 그였기에 이런 현실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거다.
자신이 한 축구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들 흥민이 축구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힘든데 그래도 할 거냐고 질문할 정도였단다. 그럼에도, 아들이 축구를 하겠다고 결정한 이후, 그는 자신이 걸어온 것과는 정반대로 아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다. 성적과 타이틀 중시보단 슈팅, 패스, 드리블 등의 기본기부터 아들에게 중점적으로 가르치는데 꼬박 7년 정도를 썼다고 했다.
나중에 체력이 다하는 20대 후반이면, 쉽게 넣을 수 있는 슛도 못 넣는 게 기본기 부족에 있으니, 축구선수는 슈팅, 패스 등의 기본기부터 철저하고도 차근히 다져야 한다는 게 아버지 손웅정의 지론이었다. 정말 그의 지론대로만 하면 한국축구가 유럽, 남미 대륙의 강팀을 만나더라도 꿀리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압도하는 축구를 지금보다도 더 많이 펼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EPL에서 활약하는 손흥민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아버지를 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등의 희생을 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그런데 아버지 손웅정의 대답은 달랐다.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를 위해 밤새 타본 적이 있거나 불사른 적이 있냐고 물어보며, 자신은 아들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무엇이든 내가 해야만 한다고 했다면 했을 것이라고 답한다. '술드(Should)'가 아닌 '원트(Want)'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기존중에서부터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삶도 생각해보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슐드(Should)와 같은 생각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해야 한다는 원트(Want)의 생각으로 뭔가를 할 때 정말 기뻤다, 거기에서 나의 존재감을 찾는 것 같았다. 나에겐 장애인권리협약 NGO보고서연대 및 NGO연대 내에서 민간보고서를 함께 공동으로 작성하는 일을 하거나, 축구를 보러 독일, 러시아, 카타르로 여행하기 위해 비행기 표, 숙박을 스스로 예약·결제했을 때 등이 그랬다.

물론 술드(Should)란 생각으로 뭔가를 할 때도 있었다, 사회복지학과 편입 시절 장애인복지관에서 현장실습을 할 때 나는 자폐성 장애인이고, 복지현장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래도 사회재활보단 직업재활을 실습하는 것이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낫겠다고 생각해 사회재활로 실습을 신청했다. 하지만 나의 의사는 무시되고, 복지관 측에선 사회재활로 나의 실습 분야를 배치했다.
그래도 나의 발전을 위해서 그랬거니 하고, 사회재활 실습을 했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서툴러 실습하는 내내 힘들었다. 물론 치열하게 사람을 상대했던 경험이 적어서 그렇기도 하고, 내가 오만해서일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의사가 무시되고 그래도 오로지 해야 한다는 슐드(Should)란 생각이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 환경을 갖추고 있나까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현실을 생각해보며 조금은 암울하다.
아동이 지적 또는 자폐성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되면, 부모는 아동을 다양성의 관점에서 축복하기보단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지 않았냐며 분노하고 슬퍼하고 자책한다. 그러다 아이의 장애를 고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고 하며 언어치료, 미술치료, 행동치료 등 할 수 있는 치료란 치료는 아동이 받도록 한다.
그러다 장애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제서야 장애가 있는 자녀의 장애와 행동을 수용하고, 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지원하는 게 대한민국의 지적·자폐성 장애가 있는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겪었을 거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일 것이다. 물론 형태가 다를 수 있지만 말이다. 권리 의식이 향상됨에 따라, 자녀의 장애를 다양성으로 일찍 수용한 부모들도 일부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부모들과 사회가 장애인(돌봄 요구가 심각하든, 심각하지 않든 상관없이)을 치료하는 것에 주로 신경을 썼지, 이들이 삶을 살면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이들의 강점은 무언지에 대해선 알려고 하는데 상대적으로 게을리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의 욕구, 의사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등이 그 이유며, 특히 돌봄 요구가 심각한 지적·자폐성 장애인과 관련해선 그러하다.
정부가 보완대체의사소통(AAC)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언어 외에 몸짓, 손짓 등 돌봄 요구가 심각한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의사소통수단 등을 인정하지 않는 비장애 중심의 의사소통체계가 뿌리 깊으니 그럴 만도 하다. 비장애 중심의 사회 가치관에 적응하지 못하면 배제하는 우리 사회의 장애의 의료적 모델에 따른 가치관도 한몫한다.
그런데 이게 장애인권리협약에서 말하는 원칙 중 하나인 평등과 비차별 원칙을 위반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임을 사회가 알기나 할까? 알면서도 귀찮고 불편하거나, 비장애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고 싶어서 모르는 척하는 걸까? 나도 이 질문을 한다면 나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대한민국의 지적·자폐성 장애인(돌봄 요구가 심각하든, 심각하지 않든 상관없이) 대부분은 소위 말하는 문제행동(없어져야 할 말)이든, 언어든 몸짓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했을 때 존중받는 경험보다는 무시당하거나 부모나 가족, 사회에 의해 자신의 의견을 억압당하는 경험들을 자주 했다. 의견 무시를 매일 일상적으로 당하는 지적·자폐성 장애인도 있지만 말이다.
물론 자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랬으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거여도, 부모가 생각하기에 자녀가 위험에 처하거나 남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면, 자녀 의견을 억압·무시하려는 게 우리 사회에선 상당히 많을 정도다. 나도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었고, 간접적으로 종종 듣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 자기결정권, 선택권 증진은 원천적으로 어렵거나 차단된다.

최근 윤석열 정부에서 개인예산제를 추진한다고 한다. 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중시하자는 취지인데, 취지는 좋다. 이 제도가 실효적이려면 어때야 하는지는 장애인 당사자와 많은 전문가들이 앞으로 좀 더 깊게 심도 있는 논의를 할 것이라 본다.
그런데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진정한 의사와 의지, 선호, 욕구가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자신들이 원해서 선택하기보단 어쩔 수 없이 선택을 강요당한다. 심지어 고인지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정책을 제안하고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도 사회, 심지어 가족까지 별로 중하게 여기지 않거나 무시하거나 생까는 사회이니 말이다.
장애인의 의지, 선호, 욕구를 중시하는 장애의 인권적 모델이 아닌 의료적 모델에 기반한 사회이니 이런 상황에서 개인예산제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에겐 무의미하고 심지어 이 제도가 성공하거나 성숙·발전하기란 만무하다고 감히 말하련다. 개인예산제의 세부 사항이 어떻든 상관없이 말이다.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자유롭고 고지된 동의 없는 위치추적장치 발부도 역시 의료적 모델에 기반한 우리 사회라 가능한 거다,
물론 좋아하는 것을 하려면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도 져야 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책임과 의무도 당연히 져야 한다. 하지만 책임과 의무 자체보다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몸짓이든 언어든 의사소통수단을 통한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의사, 의지, 선호를 존중하는 인권적 모델에 기반하는 사회라면, 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가고, 기꺼이 원하는 것을 하며 이에 따르는 책임·의무까지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비장애 중심의 사고관에 얽매여 지적·자폐성 장애인에게 치료라는 명목으로 이룰 수 없는 기준을 강요하는 부모들과 가족, 사회 구성원들이 있다면 그 강요가 이들에 고문임을 정말 알았으면 좋겠다. 아울러 지적·자폐성 장애인에게 슐드(Should)가 아닌 원트(Want)의 삶이 불가능한 게 아닌 가능한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도 나 자신을 다시 성찰해야겠다.
이들도 동등한 인간이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제대로 자신이 주도할 수 있도록 사회가 이들을 정말로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이들이 내리는 사소한 결정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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