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8일 MBC 드라마 ‘일당백집사’ 12화에는 초등학생 ‘설아’(주예림 분)의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드라마에서 백동주(이혜리 분)는 장례지도사로 염을 하기 위해 고인을 단장하는 일을 한다. 그녀는 고인을 단장하는 동안 그와 교감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생전에 가난하지만 꿈이 많았던 설아를 장례식장에서 고인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가난을 견디지 못한 설아의 엄마 박혜진(박정연 분)은 잠든 설아를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백동주는 설아 모녀의 견디기 힘든 가난에 대한 이해보다는 꿈많은 초등학생을 죽인 엄마 박혜진에 분노한다. 배경으로 나오는 매스컴에서도 이 비속 살해 사건에 대해 ‘아동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잘못된 양육 태도’를 지적하며 죽은 엄마를 비판한다.
한편 현실에서 같은 날 12월 8일, 38년간 돌보던 중증뇌병변장애인 딸을 살해한 인천의 60대 여성 A씨에 대한 결심공판이 열렸다.
검찰은 살인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A씨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A씨는 지난 5월 23일 자택에서 딸 B씨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먹여 살해한 뒤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가 목숨을 건졌다.
대부분의 매체들은 검찰의 구형 사유보다 A씨의 변호인과 동생의 증언, A씨 본인의 최후진술 등을 부각하며 의사소통이 어려운 중증 뇌병변장애에 대장암까지 앓고 있는 B씨를 38년간이나 홀로 돌봐온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는 태도의 기사를 쏟아냈다.
활동지원서비스 등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있음에도 왜 A씨가 홀로 B씨를 돌봐야 했는지, A씨의 선처를 바라는 B씨의 동생의 탄원서에 쓰인 '40년 가까이 누나와 함께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살았다.'는 표현으로 보아, A씨가 B씨의 장애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38년간 집안에 사실상 감금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B씨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살해한 A씨의 비속살해에 대한 검찰의 구형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등에 대한 취재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한 종편 시사 프로그램은 이 사건을 다루며 중증장애인 가족들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거주 시설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 두 사건 모두 명백한 비속 살해이며,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건 모두 1차적으로 가난과 돌봄 부담의 책임을 개인과 그 가족들에게 오롯이 전가하고 있는 국가와 지역사회에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같은 비속 살해사건을 대하는 대중의 인식을 우리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동이건, 성인이건,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사람의 생명은 똑같이 존엄하다.
그런데 비장애인 초등학생 딸을 살해한 엄마에게는 ‘잘못된 양육 태도’ 운운하며 ‘깨어나면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죽어서도 벌 받아야 한다.’며 분노하면서, 38년간이나 돌보던, 아니 사실상 감금 상태에 있었을지 모를 중증뇌병변장애인 딸을 살해한 엄마에게는 왜 비난은커녕 거주시설이라는 ‘잘못된 복지 정책’ 운운하며 정상참작을 이야기하는가?
만약 초등학생 비속 살해 사건 후속대책으로 아이를 내다 버릴 보육원의 확대를 이야기한다면 공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드라마에서 설아는 가수가 되어 엄마와 행복하게 살거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존재인 반면, 현실의 B씨는 의사표현이 어렵다는 이유로 꿈이 무언지 알 필요도 없는, 엄마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고 고통만 주는 그저 암덩어리 같은 존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B씨는 무슨 죄가 있는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게 죄인가?
무조건 똑같이 비난하거나 두둔하자는 말이 아니다. 납득할 수 있는 동일한 기준에 의해 판단하고 참작이 가능한 부분은 참작하되 비판해야 할 부분은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 ‘장애인도 사람이다.’는 말은 2022년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야기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에 기대어 장애인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부문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그런 정부에 맞서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기 위해서는 나의 권리 뿐 아니라 타인의 권리, 보편적 인권과 평등, 민주주의가 과연 무엇인지,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끊임없는 고민과 실천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인천 비속 살해 피해자 B씨의 명복을 빌며, 가해자 A씨의 혐의가 좀 더 명확하게 밝혀지고, 죄에 합당한 선고가 내려지기 바란다. 그에 앞서 장애인권리예산, 권리입법이 쟁취되어 가난과 돌봄부담을 국가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사회가 하루속히 실현되기를 바란다.
2022년 12월 13일
사단법인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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