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16강 진출 쾌거의 기쁨이 1주일도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장애계에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장애인권리협약 비준 후 14년이 지난 2022년 12월 8일, 드디어 UN 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우리나라엔 장애인차별금지법(이하 장차법)이 있지만, 4조 3항 1호에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차별로 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장애인차별 면죄부 조항으로 작용했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에 장애 감수성이 있는 위원들이 많지 않고, 장애인차별 진정사건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높은 기각률로 인해 장애인차별은 뿌리 깊게 만연하고 있다.
더군다나 장애인권리협약 25조 마호의 생명보험 가입 차별 금지에 대해 우리 정부가 유보해온 터라, 선택의정서 가입을 유보한 상황이었다. 이에 국내의 모든 법적, 행정적 절차를 거치고도 미해결된 차별문제를 유엔에 진정할 수 있는 개인진정제도와 시설 인권침해 등을 위원회 인지 시 당사국에 방문해 조사하는 직권조사제는 우리나라에선 그저 꿈에 불과한 상황이기도 했다.
이에 장애인 당사자들과 장애인계, 그리고 시민사회 등은 장애인 권리의 실질적 증진을 위한 선택의정서 비준을 촉구했다. 그 결과, 작년 12월엔 선택의정서 유보 조항인 권리협약 25조 마호의 유보를 철회한다는 정부 발표가 있어, 선택의정서 비준이 조만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임기 만료 때까지도 선택의정서 비준 이슈는 국회에 계류 중이었던 상태라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계속 미뤄졌고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계는 이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게다가 올해 8월 말 열린 UN 장애인권리협약 제2·3차 대한민국 정부심의 결과 9월 9일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정부는 선택의정서 비준을 다시 권고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 당사자들과 장애인계는 국회에 UN 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 비준을 다시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에선 장애인 비례대표인 김예지 의원이 선택의정서 비준을 위한 토론회를 1~2년 전부터 수차례 개최하고, 작년 6월 말엔 여야 의원 74명의 공동발의를 받아 선택의정서 비준 촉구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다. 최근까지도 의원들에게 이 이슈에 대한 절실함을 말하는 등 선택의정서 비준에 대해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장애계, 장애인 당사자, 시민사회 단체와 김예지 의원 등이 이렇게 노력한 결과, 올해 11월 23일 국회 내 외교통일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선택의정서 가입동의안이 통과되더니 마침내 12월 8일에 이 동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 되었다. 국내의 모든 법적, 행정적 절차를 거치고도 미해결된 차별문제가 많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하면 선택의정서 비준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를 마련한 셈이다.
물론 선택의정서 비준했다고 ‘땡’인 게 아니라는 점은 잘 아시리라 믿는다. 개인진정의 경우, 피해를 입은 장애인 당사자들, 가족 등이 유엔에 미해결된 차별 사안을 진정할 때, 정확히 장애인권리협약의 어떤 내용과 부분에서 구제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진정인들의 내용에 하자가 있는 경우 진정에 대한 기각률이 나름대로 높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장애인권리협약에 나온 장애인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 등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거다. 특히 진정인이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경우엔 장애인권리협약 내용이 상당히 추상적이라, 실질적으로 장애인의 권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는데, 어려움이 많다.
필자가 장애계 단체에서 일할 당시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 ’나 여기 있어‘ 제작 경험이 있다. 이처럼 장애인권리협약을 알기 쉽게 풀이하는 노력이 국가와 지자체에 필요하다. 그것도 장애의 의료적 관점이 아닌 인권적 관점으로 풀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여기에는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계 등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초·중·고·대학교 과정 등 각급 교육과정에서 민주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지적·자폐성 장애학생 등의 장애학생(장애인)과 비장애 학생들에게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에 담긴 장애인의 권리를 단순 교육이 아닌 훈련 수준으로 학생 연령에 맞게 정기적으로 알리는 식의 노력 등이 장애인권리협약 이행을 위한 국가·지자체의 행동계획에 포함됐으면 한다.
그럴 때 비장애 학생(비장애인)이 장애학생(장애인)과 진정으로 어울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봄은 물론, 장애인 자신들이 일상생활에서 차별에 직면 시 어떤 부분에서 그랬는지를 구체적으로 유엔에 진정할 수 있는 진짜 지식이 생기게 될 테니까. 그렇게 얻은 지식으로 진정하면, 진정이 기각될 여지는 줄어들 테니 말이다.
또한, 장애인권리협약을 훈련 수준으로 정기적으로 알리는 노력들은 변호사, 의사, 각급 교육과정의 교사들, 노동계 등에도 실질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그랬을 때 실질적으로 장애인을 차별할 여지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될 터이니.
개인진정의 경우, 진정하는 당사자를 지원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장애인단체, 국가인권위원회 중 어디서 개인진정을 지원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 등에서부터 여러 의견들이 있다. 장애인단체가 진정제도 자격이나 발굴, 기초상담을 맡고, 본안 심리와 심리절차는 공신력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맡으면 어떻겠는가에서부터, 장애인단체가 개인진정을 지원하고 예산을 인권위가 지원하면 어떻느냐는 의견까지 등등....
만약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 개인진정을 지원하겠다고 하면, 일단은 인권위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 3대 권력에 대해 독립적인지부터 봐야 한다. 탈시설에 대해서 국가와 시설 세력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인권위의 현 상황이라면, 국가의 입장에 반하는 개인진정 사건을 장애인 당사자가 유엔을 통해 진정하려 할 때, 인권위가 개인진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장애가 있는 진정인을 말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리고 인권위는 장애인차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처리하는 기관에 가깝다 보니 개인진정을 지원하는 것은 조금 버거울 수도 있다. 그래서 개인진정을 지원하는 것은 장애에 대한 감수성 있고 장애인 인권에 대해 전문성 있는 시민사회, 장애인단체 중에서 맡도록 하되 관련 예산은 인권위에서 지원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장애인단체 등이 인권위에 비해 공신력과 공공성이 떨어지기는 하나, 장애인 인권에 있어서는 인권위보다 나름대로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필자의 의견과는 다르게, 공신력이 있는 기관인 인권위가 개인진정을 맡는 게 더 좋다는 의견 등 여러 의견이 있는 상황이라 앞으로 개인진정에 관한 기관 및 지원절차 등을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계,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해 장애인 권리증진을 위한 길로 나아갔으면 한다.
패소자 부담주의 원칙을 철폐하라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서도 일리 있다고 본다. 사실 법원 등 사법부의 장애 인식은 그리 좋지 못하고, 장애인 당사자들이 패소하면 상대방 변호사 비용까지 물어내야 하는 등 패소자 부담주의는 경제적으로 취약한 장애인들에겐 소송에 있어 커다란 장벽으로 다가온다. 모든 법적, 행정적 절차도 거쳐볼 엄두도 나지 않게 만드는 거다.
대한민국 정부심의 1차 때 패소자 부담주의 원칙 폐지에 대한 권고 있었지만, 이번 2·3차 때도 똑같은 권고였다. 그만큼 정부는 장애인권리협약에 대한 인지나 이행 의지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패소자 부담원칙 철폐를 정부가 이행할 때, 선택의정서 개인진정 활용이 높아지는 등 장애인 권리 증진의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니 말이다.
유엔에서는 요즘 개인진정에 대한 권고를 당사국에 보낸 다음, 어떻게 후속조치를 하는지 국가보고서에 보고하라는 새로운 조치를 내놓고 있다고 한다. 또한, 개인진정 이후 결론이 나기 전까지 국가가 진정인에게 보복하지 않도록 유엔에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선택의정서 진정 권고를 어떻게든 이행하도록 유엔은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협약을 밥 먹듯이 무시하는 태도를 보면, 개인진정 관련 권고에 대해서도 이행하고 있다고 보고서 정부심의 때처럼 거짓말을 줄줄이 신나게 할까 우려된다. 이러면 계속 주기적으로 진정에 대한 권고를 유엔은 내릴 것이다. 정부가 이런 일을 계속 겪고 싶지 않다면, 정부 내에서도 공무원들에게 단순 교육 차원이 아닌 훈련 수준으로 장애인권리협약을 교육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외에도 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를 국문으로 번역했다고 하니, 선택의정서 내용에 대해 지적·자폐성 장애인 등이 좀 더 알기 쉽거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협약의 정신에 맞게 다시금 내용을 재가공해 배포하고 교육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그전에 장애인권리협약에 담긴 장애인 권리가 무엇인지부터 아는 것이 당사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임을 말해두고자 한다.
장애인 선택의정서 개인진정 등을 잘 활용하면, 장애인차별을 공고히 유지할 수 있었던 정책과 제도들이 조금씩 조금씩 인권적 모델에 기반한 것으로 바뀔 수 있는 등 기대감이 생긴다. 앞으로 이 제도에 대한 활용을 장애인들이 정말 많이 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장애인들의 열망이었던 UN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 비준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이게 장애인 인권이 실질적으로 증진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울러 탈시설 이슈로 분열된 장애계가 이번 비준을 계기로 다시금 힘을 합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장애인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 선택의정서 비준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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